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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of May 10, 2014
세계 최대 동굴 법당이 있는 일붕사
일붕사는 천혜의 자연 요건을 갖춘 봉황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이 사찰이 유명한 것은 동굴법당. 이 법당은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이 법당의 크기는 456.2m²(138평)과 297.5m²(90평). 현재 불자들의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 도량으로 하루 평균 2백여 명의 불자들이 오고 있다. 일붕사는 사찰대지 16,529m²(5천평), 임야 99,174m²(3만여평), 신도수 2천여세대, 석굴 대웅전 456.2m²(138평), 석굴무량수전 297.5m²(90평), 제1요사, 제2요사, 조사전, 약사전, 북극전, 나한전, 산신각, 종각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서기 727년 신라의 혜초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이다. 일붕사는 약 1330년 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때 최고의 격전지였다. 당시 왕군이 봉황대 영역 안에 이 지역의 수많은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찰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태종 무열왕의 삼왕자가 계셨던 궁소 봉황대의 사찰에서 비로자나불을 안치시켜 호국 일념으로 성덕왕의 덕을 기렸고 성덕대왕이 봉황대의 산세가 빼어남과 선당의 얼이 베인 곳을 천추만대에 기념하자는 뜻에서 자신의 왕호를 내려 성덕사라는 귀족적 사찰을 지었으니 과히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덕사도 이조 성종25년 국령으로 불사 33개소를 회합함으로서 그 영향을 받아 승려를 학대하고 사찰을 파괴함으로서 봉황대 성덕사는 어쩔 수 없이 사찰을 궁류면 운계리 팔사곡 자사산으로 옮겨 정수암으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그 후 (148년전)에 장사곡 출신의 어떤 인물이 들어와 승을 축출하고 암자를 파괴할 때 쇠망치로 수없이 내려쳐도 미륵불상 한불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 주승이 범상치 않은 일이라며 그 불상을 업고 합천군 연호사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연호사 불상 중 일부분이 성덕사 불상이라고 전해온다.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암자로 있다가 1934년 8월 26일 당시의 면장이 산주와 더불어 봉황대의 덕경을 도우기 위하여 벚꽃나무를 심고 관세음보살상과 여래불상을 모셨으나 소실되어 다시 이야용 스님이 법당을 짓고 성덕사라 하였다.
그러나 1984년 10월 24일 누전으로 인하여 또다시 성덕사법당이 완전 소실되었으나 1986년 7월 26일 사단법인일붕선종회 (지금의 재단법인 일붕선교종) 창종주 일붕 서경보 종정 큰스님이 혜운 주지스님을 부임케하여 이 산 이름이 봉황산이라 산의 기가 너무 세어 사찰이 부지 못하니 기를 줄이기 위해 굴을 파야 한다고 하시므로 주지스님이 불사를 이룩, 사찰명을 일붕사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붕사(의령)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의령 부자마을에 위치한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
호암생가는 삼성그룹의 창업자이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끈 대표적 기업가인 호암 이병철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1851년 호암선생의 조부께서 대지 면적 1,907㎡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손수 지었으며, 호암선생은 유년시절과 결혼하여 분가하기 전까지의 시절을 이 집에서 보냈다. 일자형 평면형태로 지어진 생가는 남서향의 평평한 땅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동안 몇 차례의 증·개축을 거쳐 은은하고 고고한 멋을 풍기는 오늘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현재의 생가는 안채, 사랑채, 대문채,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담한 토담과 바위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구분되고, 주위로는 울창한 대숲이 조성되어 운치있는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집은곡식을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氣)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혈(穴)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地勢)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南江)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당(明堂)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 호암 이병철 선생(湖巖李秉喆先生)에 대하여 *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이래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기업을 일으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1961년에는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를 발의하고 초대회장에 추대되었다. 1965년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우리의 정신적 자산을 풍족하게 하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고, 1980년대에는 특유의 통찰력과 선견력으로 반도체산업에 진출하여, 우리나라 첨단산업의 발전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호암선생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하였다. 또한, 선생은 성균관대학교 운영을 통한 인재육성을 비롯, 문화, 예술,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의 발전에 많은 업적과 교훈을 남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암 이병철선생 생가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곽재우 의병장 생가
2005년 복원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생가로,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형태로 꾸며졌으며, 안채·사랑채·별당·대문간채·중문간채·대곳간채·소곳간채 등 7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대지면적은 5,636㎡이다. 의령군은 2008년 11월 현재 생가활용 및 주변정비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사업이 마무리되면 생가 내에 숙박체험시설과 건물 내의 생활모형이 마련되고, 생가 뒷산에는 곽재우가 칼싸움을 하던 장소와 공부하던 장소 등이 새로 정비된다.
생가 바로 앞에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 제302호로 지정된 수령 600년이 넘은 노거수가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제493호인 ‘의령 세간리 현고수’가 있다. 현고수(懸鼓樹)는 수령 52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로 ‘북을 매던 나무’라는 뜻인데 임진왜란 때 곽재우장군이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병장 곽재우생가 [義兵將郭再祐生家]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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